아아, 신경득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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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은 1989년경에 대구에서의 어떤 경험을 통해 깨도를 얻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의 문학에 대한 관점은 많은 변화를 보인다. 「민족문학을 위하여」, 「깨도문학이란 무엇인가」, 「추임문학이란 무엇인가」,「혁명의 꽃과 칼」, 「다시 한민족문학을 위하여」등의 저술을 통해 제국주의 문학이론을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게 된다. 서양의 문학용어를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 쓰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깨도문학’,이나 ‘추임문학’, ‘그루갈이 삶’, ‘각시바치’ 등의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려 하였다.
교수님은 소설로 등단했지만, 그 이후의 소설은 본 적이 없다. 다만, 1990년대에 시집 두 권을 쓰셨는데, 지금 읽어보면 그땐 왜 이런 감동을 못 느꼈을까 싶을 만한 작품들이 더러 있다.
너는
한지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닥나무에서 금방 벗겨낸 껍질처럼
부드럽고 질긴 사람
저 조선왕조실록을 품에 안고도
썩거나 상하지 않는 사람
풀을 발라 문에 바르면
탱탱 소리를 내는 결기 있는 사람
강풍은 돌려보내고 미풍만 받아
신선하고 다사로운 사람
센 빛은 돌려보내고 여린 빛만 받아
조용한 빛을 뿜는 사람
무더위에 지쳐 습기가 가득할 때
습기를 빨아들여 주변을 쾌적하게 정화하는 사람
한겨울 눈바람이 몰아칠 때
한 장 문풍지로 징징 울어
가족의 따뜻한 잠자리를 위해
밤새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
한지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너는
-「한지」전문
이 시를 읽으면 신경득이라는 사람이 마음이 여리고 따뜻한 사람, 부드러운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맞으면서도 일면 틀린 데가 있다.
데모를 하다 감옥에 간 제자들에게 꼬박꼬박 영치금을 넣어주실 만큼 가슴이 따뜻하고 부드러웠지만, 그의 시 「한지」에서처럼 ‘결기 있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신문을 읽어드리며 나라 돌아가는 이야기를 잠깐씩 나누었는데, 그럴 때면 매번 아주 격한 감정으로 위정자들을 성토하곤 했다. 특히 친일파를 싫어했는데, 1학년 근대문학론 수업에서는 ‘암살단’을 조직해서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해야한다는 주장으로 대학에 갓 들어온 새내기들을 충격에 빠트렸을 정도로 과격한 면이 다분한 분이었다.
그런 교수님은 진주지역에서 친일청산을 위해 발 벗고 나서서 큰 이슈를 만들기도 했었다. 진주 촉석루 사당에 안치되어 있는 논개 영정이 친일파 김은호의 작품임을 밝혀내어 친일파가 그린 ‘미인도’를 촉석루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금은 시민단체에서 ‘미인도’를 뜯어내어 시청에 보관중이라고 한다.
또, 1991년 대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지던 때 터진 김지하의 조선일보 기고문 사건 때는 ‘생명과 신명의 대파산’이라는 글로 김지하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등, 글을 통한 지식인의 책무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던 분이었다.
강의를 하실 때에는 온 강의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셨다. 신념에 찬 어조와 단정적인 어투의 강의는 강의라기보다는 연설이나 웅변에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번은 오랜만에 교수님을 찾아뵈었더니 배달되어 온 소포를 뜯어보라고 하셨다. 큰 종이박스 안에는 한자투성이의 문서가 십여 권 들어있었다. 표지를 보니 ‘1950년 전국 교도소 수감자 명단’이라고 되어 있었다. 어렵게 구했다고 하시는 교수님 표정에서 어떤 기대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랬다. 교수님은 백발이 다 되어서까지도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는 일을 계속 해 오셨던 것이었다.
비록 당신 아버님의 행적을 찾지는 못했지만, 교수님께서는 그 울분을 자신의 한으로만 삼키지 않고 민족적 아픔으로 인식하셨다. 그렇기에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셨고 국문학자이면서도 『종군 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이라는 책을 쓰셨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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