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 속의 개구리 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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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학년 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수업시간이었다. 도덕시간에 전통과 인습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우리가 버려야 할 인습으로 \'남존여비 사상\'이 나왔고, 담임 선생님은 남존여비 사상에 대해 설명을 한 후, 이것이 우리가 계승해야할 전통이라고 생각하는지, 버려야할 나쁜 인습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계승해야할 전통이라고 주장하는 학생, 버려야할 인습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생... 그러나,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학생들은 뚜렷이 갈리고 있었다. 인습이라는 주장은 여학생 목소리였고, 전통이라는 목소리는 남학생 목소리였다. 양쪽 의견이 팽팽하자 담임 선생님은 어느 의견이 많은지 손을 들어보게 했다. 예상한 대로 남자아이들은 모두, 아니 나를 뺀 남자아이들 모두가 전통이라는 의견에 손을 들었다. 물론 아이들은 내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다음으로 인습이라는 의견에 모든 여자아이들의 손이 올라갔고 마지막으로 나의 손이 올라갔다. 모든 남자아이들의 눈총이 나에게 쏟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같은 남자아이들을 배반(?)하고 여자아이들 편을 들었던 것은 다른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존여비 사상\'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나의 확고한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에 나의 어머니가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겪어야했던 고통과 서러움을 직접 봐 왔기 때문이었다. 부뚜막에 앉아 우리 형제를 끌어앉고 우시던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도저히 그것을 전통이라고 우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다른 남자아이들의 눈총을 무릅쓰고 옳은 것을 옳다고 한 그때의 나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그건 분명 용기였던 것이다. 내가 여학생들 편을 들어준 덕에 여학생들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남자도 싫어하는 남존여비는 없어지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주장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안이 발생했을 때,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이나 행동은 대부분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의약분업 파동을 떠올려보자. 미미한 예외는 있었겠지만 의사는 의사대로 약사는 약사대로 똘똘 뭉쳐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제3자들은 그런 다툼을 밥그릇싸움 정도로 치부해버렸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니 비난할 것도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이익집단간의 첨예한 대립에 균열을 가하는 것이 있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미국의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해야한다고 주장한 미국 최고의 부자 워렌 버핏이 있다. 미 연방정부의 적자 해소를 위해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고자 하는 오바마 행정부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려는 슈퍼부자들 간의 첨예한 대립이었으나 워렌 버핏을 비롯한 용기있는 몇몇의 부자들이 나서서 자신들과 같은 슈퍼부자들에게는 세금을 더 올려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세금을 더 내지 않으려는 부자들의 주장을 지극히 이기적이고 쫀쫀한 주장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
이런 ‘자기 배반’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이 속한 집단과 반대되는 주장을 함으로써, 그 주장이야말로 이해관계를 떠난, 반드시 옳고 숭고한 가치일 것이라고 여기도록 한다. 그리하여 양측의 팽팽한 대립을 어느 한쪽의 우세로 기울게 하여 소모적인 논쟁을 일단락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자기 배반’이 엉뚱한 곳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어제 한미FTA가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이정희 대표 단 한 사람만이 협정문을 다 읽어 본 유일한 국회의원이란다. 그만큼 우리가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해 아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환상을 갖는다거나 비관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가장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ISD만 놓고 보더라도 이 협정이 누구를 위한 협정인지는 알 수 있다. 투자자가 자기 이익에 침해를 당했을 때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은 공익적 국가 정책조차 기업의 이익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은 한국이나 미국 어느 한 국가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것이 아니라, 양국의 자본에게만 유리한 협정인 것이다. 자본의 이익 극대화를 보장하기 위한 협정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필립모리스라는 담배회사가 호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호주 정부가 금연 정책의 일환으로 모든 담배의 포장을 똑 같은 것으로(담배 이름만 표기하는 방식) 만들도록 규제하자 이 나라에 담배를 수출하는 미국의 필립모리스사가 호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미국과 호주 사이에는 ISD협정을 맺지 않아서, 호주와 ISD 협정을 맺은 홍콩에 있는 지사 이름으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호주 정부는 지금껏 실시해오던 정책을 계속 실시하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배상까지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국가 정책은 기업의 이익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국적 자본 앞에 국가라는 개념은 더 이상 쓸모없는 이름이 될 것임을 잠작할 수 있다.
또, 최근에 투기자본 론스타가 여러가지 불법을 저지르며 막대한 이득을 챙겨서 우리나라를 떠나게 되었지만, 금융위원회에서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인정사정 보지 않고 덤벼들어 부리로 쪼고 발톱으로 할퀴는 것이 다국적 자본이다. 그런 자본의 발톱으로부터 국민의 권익을 보호해주어야 할 국가라는 것이 이제는 더이상 국민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않는다. 이제 우리 개개인이 거대 자본과 직접 맞짱을 떠야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몇 달 전부터 미국에서는 월가의 1% 에 반대하는 99% 의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사회도 상위 1% 를 위한 무한 경쟁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속한 99%에 대해 월가의 시위대만큼 자각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자기배반’을 일삼기도 한다. 우리가 속한 99%의 생존이 아니라, 1% 거대 자본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도 한다. 그것이 결국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하기에. 마치 서서히 끓고 있는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내가 같은 남자아이들을 배반(?)하고 여자아이들 편을 들었던 것은 다른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존여비 사상\'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나의 확고한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에 나의 어머니가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겪어야했던 고통과 서러움을 직접 봐 왔기 때문이었다. 부뚜막에 앉아 우리 형제를 끌어앉고 우시던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도저히 그것을 전통이라고 우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다른 남자아이들의 눈총을 무릅쓰고 옳은 것을 옳다고 한 그때의 나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그건 분명 용기였던 것이다. 내가 여학생들 편을 들어준 덕에 여학생들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남자도 싫어하는 남존여비는 없어지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주장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안이 발생했을 때,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이나 행동은 대부분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의약분업 파동을 떠올려보자. 미미한 예외는 있었겠지만 의사는 의사대로 약사는 약사대로 똘똘 뭉쳐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제3자들은 그런 다툼을 밥그릇싸움 정도로 치부해버렸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니 비난할 것도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이익집단간의 첨예한 대립에 균열을 가하는 것이 있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미국의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해야한다고 주장한 미국 최고의 부자 워렌 버핏이 있다. 미 연방정부의 적자 해소를 위해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고자 하는 오바마 행정부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려는 슈퍼부자들 간의 첨예한 대립이었으나 워렌 버핏을 비롯한 용기있는 몇몇의 부자들이 나서서 자신들과 같은 슈퍼부자들에게는 세금을 더 올려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세금을 더 내지 않으려는 부자들의 주장을 지극히 이기적이고 쫀쫀한 주장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
이런 ‘자기 배반’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이 속한 집단과 반대되는 주장을 함으로써, 그 주장이야말로 이해관계를 떠난, 반드시 옳고 숭고한 가치일 것이라고 여기도록 한다. 그리하여 양측의 팽팽한 대립을 어느 한쪽의 우세로 기울게 하여 소모적인 논쟁을 일단락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자기 배반’이 엉뚱한 곳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어제 한미FTA가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이정희 대표 단 한 사람만이 협정문을 다 읽어 본 유일한 국회의원이란다. 그만큼 우리가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해 아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환상을 갖는다거나 비관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가장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ISD만 놓고 보더라도 이 협정이 누구를 위한 협정인지는 알 수 있다. 투자자가 자기 이익에 침해를 당했을 때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은 공익적 국가 정책조차 기업의 이익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은 한국이나 미국 어느 한 국가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것이 아니라, 양국의 자본에게만 유리한 협정인 것이다. 자본의 이익 극대화를 보장하기 위한 협정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필립모리스라는 담배회사가 호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호주 정부가 금연 정책의 일환으로 모든 담배의 포장을 똑 같은 것으로(담배 이름만 표기하는 방식) 만들도록 규제하자 이 나라에 담배를 수출하는 미국의 필립모리스사가 호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미국과 호주 사이에는 ISD협정을 맺지 않아서, 호주와 ISD 협정을 맺은 홍콩에 있는 지사 이름으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호주 정부는 지금껏 실시해오던 정책을 계속 실시하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배상까지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국가 정책은 기업의 이익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국적 자본 앞에 국가라는 개념은 더 이상 쓸모없는 이름이 될 것임을 잠작할 수 있다.
또, 최근에 투기자본 론스타가 여러가지 불법을 저지르며 막대한 이득을 챙겨서 우리나라를 떠나게 되었지만, 금융위원회에서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인정사정 보지 않고 덤벼들어 부리로 쪼고 발톱으로 할퀴는 것이 다국적 자본이다. 그런 자본의 발톱으로부터 국민의 권익을 보호해주어야 할 국가라는 것이 이제는 더이상 국민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않는다. 이제 우리 개개인이 거대 자본과 직접 맞짱을 떠야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몇 달 전부터 미국에서는 월가의 1% 에 반대하는 99% 의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사회도 상위 1% 를 위한 무한 경쟁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속한 99%에 대해 월가의 시위대만큼 자각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자기배반’을 일삼기도 한다. 우리가 속한 99%의 생존이 아니라, 1% 거대 자본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도 한다. 그것이 결국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하기에. 마치 서서히 끓고 있는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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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박진만님의 댓글
동인박진만 작성일 Date글 잘 읽었습니다. 국민 아니 서민들이 이제는 똑똑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